2012 02/14ㅣ주간경향 962호


영화 <도가니>에서 법원 청사에 걸린 간판을 보셨습니까? ‘자유 평등 정의’라는 간판이 떡하니 걸려 있습니다. 이 간판은 영화에서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한 네티즌은 이 간판을 ‘버젓이’ 걸려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영화 속 법원은 자유나 평등,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부자유, 불평등, 부정의’라는 간판이 걸려 있어야 했습니다. 

 

남자주인공 공유의 어머니가 법원에 와서 소송에 참여하고 있는 아들을 말리려 했을 때 법원 벽에 붙어 있는 표어는 ‘무진시민을 위한 법원, 신뢰할 수 있는 법원-무진지방법원’이었습니다. 무진은 이 영화의 무대가 된 가상의 도시입니다. 과연 신뢰할 수 있을 만한 법원인지는 영화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청각장애인에 대한 성폭행 관련자의 징계를 요청하기 위하여 인권단체 활동가는 교육청을 찾아갑니다. 영화 속 교육청에는 ‘꿈을 키우는 교실, 미래를 여는 무진교육’이라고 크게 적어 놓았습니다. 교육청 담당자는 성폭행이 방과후에 일어난 일으므로 교육청 소관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시청으로 찾아가라고 합니다. 

이 활동가는 성폭행 수사를 하지 않는 경찰서에 따지러 갑니다. 경찰서의 벽에는 ‘경찰이 새롭게 달라(졌습니다)’ ‘우리 경찰은 사건 청탁을 받지 않습니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습니다. “귀머거리의 말만 듣고 수사를 하지는 못한다”고 비아냥거리는 형사의 등 뒤에는 ‘국민을 위한 (경찰이) 되겠습니다’라는 표어가 보입니다. 분노한 활동가가 경찰서를 나올 때 ‘경찰은 항상 국민의 곁에 있습니다’라는 구호가 내걸려 있습니다. 

성폭행이 공공연하게 벌어진 자애학원의 교문 위에는 ‘무진교육청 선정 최우수 학원’이라는 현수막이 ‘버젓이’ 걸려 있습니다.  

관공서에 걸린 슬로건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슬로건에 맞게 행동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바람직한 슬로건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관공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둘째는 슬로건에 어울리는 정도까지는 되지 못하지만, 그 슬로건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공서는 종종 눈에 띕니다.  

셋째는 슬로건은 슬로건일 뿐이고, 그 슬로건에 반대되는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관공서는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배반의 슬로건은 오래 전 ‘정의사회 구현’에서 ‘공정사회 구현’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워낙 이런 구호에 배반당해 왔는지라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습니다’라는 여당 비대위의 슬로건도 국민들에게는 못내 탐탁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명까지 바꾼 여당이 정말 국민만 바라보는 정당으로 변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러시아의 시인 푸슈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읊었습니다. 영화 <도가니>는 수많은 슬로건을 보여줌으로써 이렇게 외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관공서의 슬로건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로건은 그냥 슬로건일 뿐이다.”


<윤호우 편집장 hou@kyunghyang.com>

Posted by 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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