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 구럼비바위가 위험하다

글·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올해 71세가 된 문정현 신부는 현재 제주도 강정마을에 살고 있다. 제주도 남부에 위치한 강정마을은 토양이 비옥해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논농사가 가능한 곳이다. 마을 남쪽에는 오랫동안 마을사람들의 삶과 추억이 엉킨 구럼비 바위가 있다.
 2007년 해군기지 건설이 결정된 이후 마을은 4년 반 동안 갈등을 빚었다. 기지 부지로 지정된 곳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하루 아침에 일할 곳이 없어졌다. 정부와 해군은 “국익을 위한 기지 건설”, “민주적 절차를 거친 국책사업”이라고 주장하며 해군기지 건설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보수언론은 “법치를 바로세워야 한다”, “강정마을 투쟁은 님비현상(우리 뒷마당은 안 된다)”이라며 해군기지 건설을 옹호했다.
 찬반 양측으로 나뉜 마을 내부의 갈등, 해군기지 건설부지에 포함된 구럼비 바위에 얽힌 마을사람들의 잃어버린 사연들, 육지에서 건너온 경찰에 대한 주민들의 트라우마 등은 ‘부수적 피해’로 치부됐다.
 문 신부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거짓과 사기”라고 말했다. 자신들이 동의한 적도 없는 사업 때문에 마을 공동체가 무너져내리는 상황이 저절로 문 신부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기자가 찾아간 10월 19일 오전에도 문 신부는 흰 수염을 날리며 주민들과 미사를 열고 강정에 평화가 오기를 기도했다.
 문 신부는 미사가 끝난 뒤 숙소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미사에 온 힘을 쏟아 기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날도 문 신부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몸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은 인터뷰 하기가 어렵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기자는 강정마을회관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갑자기 다시 전화가 왔다. “먼 길을 오셨는데 기다리게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마을회관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잠시 후 문 신부는 강우일 천주교 제주교구 주교가 선물해준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다.

문정현 신부는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다. / 김석구 기자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활동하는 데 불편은 없습니까.
 “그럭저럭 활동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만, 무리를 하면 가슴이 조여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꾸준히 심장약도 먹고, 비상용 스프레이도 항상 지참하고 다니죠. 증세가 오면 일단 스프레이로 가라앉히고 약 먹고 하면 또 괜찮아집니다. 그렇게 살고 있죠.”
 
예전부터 신부님의 흰 수염을 보며 ‘언제부터 저렇게 길렀을까’ 궁금했습니다.
 “10년 정도 됐지요. 전에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정의구현사제단 단식농성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4명이서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때까지 수염을 자르지 말자고 했는데 다들 깎고 저만 남았습니다.(웃음) 이제는 캐릭터가 된지라 깎을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천주교 신부이고,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아는데 형식이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오전에 미사 보느라 많이 피곤해 보입니다. 강정마을에 와서 미사를 본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6월 말에 강정마을에 들어와서 7월부터는 아예 이곳에 살며 미사를 진행했습니다. 마을회관에서 숙소도 마련해줘서 잘 살고 있습니다. 해군기지가 물러갈 때까지 여기서 쭉 살아야지요.”

제주 해군기지 문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애초부터 해군이 주민들로부터 땅과 구럼비 바위를 뺏어간 거짓과 사기지요. 이곳에 사는 주민이 성인만 해도 1000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2007년 당시 마을회장이 해군기지 유치를 찬성하는 87명만 뽑아다가 총회를 열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해군 측은 마을 주민들이 찬성한다고 거짓 선전을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주민들이 다시 제대로 된 총회를 열어서 700여 명 중에 680명이 해군기지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것이 진실이고, 해군 측의 주장은 사기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해군과 보수언론에서는 우리가 불법으로 땅을 점거하고 시위를 한다고 그래요. 거짓말하는 쪽에서 우리가 거짓말한다고 나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투쟁할 수밖에요.”

얼마 전에 김황식 총리가 해군기지 문제로 인한 갈등의 원인이 외부세력에 있다고 말한 바도 있습니다. 이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나요.
 “보수언론에서도 그런 식으로 우리를 비판하죠. 사실 해군이야말로 외부세력이죠.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도 왜 남의 일에 간섭하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자신들은 간섭해도 되고, 저 같은 사람은 세금이 들어가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논리일 뿐입니다. 외부세력 운운하는 것은 무서운 논리입니다. 그들 논리는 고통받는 이웃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강정마을 사람들이 이대로 나락으로 빠지게 놔두라는 겁니다. 이웃으로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는 논리입니다.”
 
‘지금 꼭 강정마을에 와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특별히 있습니까.
 “사실 예전부터 군사기지 문제가 제 관심사였습니다. 1996년에 제가 전북 군산 오룡동성당 주임신부로 있었습니다. 우리 민항기가 군산 미군기지 활주로를 이용해서 군산과 서울을 오가곤 했는데, 미군에 사용료를 내고 있었습니다. 우리 땅을 내줘서 만든 기지인데 사용료까지 내라니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용료 계약을 갱신하면서 그때 국가경제가 위태로운 상황인데 사용료를 5배나 올렸습니다. 나중에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문제 제기도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고요. 제주도 해군기지도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습니다. 강정마을 이전에 서쪽에 화순리가 해군기지 예정지였을 때도 대책위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언젠가는 꼭 제주도에 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이 처음 결정된 2007년부터 강정에 자주 들렀습니까.
 “2007년에 평택 미군기지 투쟁을 마치고 나서 강정마을을 찾았죠. 이미 그때부터 강정 주민들은 해군의 기지 건설 강행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때 갈치·고등어 등을 팔아서 현금 1300만원 정도를 전달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2009년에 용산참사가 났습니다. 용산에서 11개월을 살며 싸웠는데, 중간에 강정마을 회장이 저에게 ‘제주도에 내려와 달라’고 연락을 했어요. 그때는 참 몸이 두 개였으면 하고 아쉬워했습니다. 작년에 용산참사가 마무리되고 난 뒤에도 강정에서 와달라고 전화가 왔었는데 그때는 제가 올 수가 없었습니다.”

용산참사 문제가 마무리되고 나서는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도회를 길게 하셨죠.
 “8월부터 명동성당에서 기도회를 했습니다. 정진석 추기경이 용산에서 사람이 죽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명동성당에서 4대강 반대 기도를 했더니 ‘영업방해’라며 농성천막을 철거해 갔습니다. 그때 내가 명동성당을 ‘명동주식회사’라고도 했는데 별 반응이 없었어요. 정 추기경하고 개인적으로 선·후배이고, 잘 아는 사이이고, 같이 공부도 했는데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도 됐습니다. 문정현, 너는 성직자답게 철저하게 살아가고 있느냐. 그렇게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8개월 동안 명동성당에 있었습니다.”

제주 해군기지 문제가 요즘 국회에서도 논의가 되고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해군기지 추진 과정의 비민주성이나 기지건설 이후 마을 내부의 갈등과 같은 자세한 부분까지 아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갑자기 문 신부의 언성이 높아졌다. 언론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주간경향>도 여균동 감독의 기고를 한 차례 실었을 뿐, 제주 해군기지 문제를 제대로 다룬 적은 없었다. 일부러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머쓱해졌다.
 “그건 기자들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이죠. 제가 기자들에게 묻고 싶은 게 그거예요. 왜 강정마을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느냐고. 저도, 마을사람들도 조금이라도 강정 소식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잘 안 됩니다. 몇몇 인터넷 언론사에서 온 사람들이 아예 이곳에 한두달씩 머물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나 강정마을 얘기를 볼 수 있지, 신문이나 방송에서 강정마을 문제를 다룬 것은 도통 본 적이 없습니다.

강정마을 마을회관에서 문정현 신부. / 김석구 기자



언론이 통제되고 있다는 말인가요?
 “예전에는 아니었죠. 참여정부에도 서운한 점이 많지만 그때만 해도 언론이 어느정도는 제 기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언론 통제가 심해졌습니다. 방송 뉴스에는 마을의 처참한 모습이나 주민들의 고통은 나오지도 않습니다. 주민들과 경찰이 물리적 충돌을 벌였다는 보도만 나옵니다. 그럴 때는 TV를 깨뜨려버리고 싶은 생각도 납니다. 그나마 우리를 대변해주는 언론에서 강정마을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로 제주지역 지면에 기사가 나오죠. 그러면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강정 문제를 알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문정현 신부는 연신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쳤다.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문 신부를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한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투쟁으로 화제를 돌렸다. 기자도 개인적인 추억이 있는 사건이다

대추리 미군기지 문제로 신부님께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탄 적이 있었죠. 그때 제가 의경으로 군복무를 하며 대추리를 자주 다녔습니다. 아마 신부님과도 마주친 적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아이러니가 있습니까.(웃음) 길에서나 버스정류장에서나 간혹 인사를 해오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신부님을 대추리에서 뵈었습니다. 그때 많이 얻어맞기도 했지만 존경합니다.’ 이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당연히 누군지 기억이 안 나는데 그쪽에서는 기억에 남았던 모양입니다. 저를 미워하고 저주했다면 그런 인사를 하지 않았겠죠. 진심으로 마음이 있으니까 그렇게 인사를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집회가 한 번 열리면 전·의경이 1만여명씩 동원됐습니다. 경찰버스가 하도 많아서 대추리 입구에서 한참 떨어진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진압복에 장비까지 전부 갖춰서 새벽에 2시간 정도 땀 뻘뻘 흘려가며 행군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신부님은 언제가 가장 기억에 납니까.
 “2006년 5월 4일 어린이날 전날에 있었던 행정대집행이 기억납니다. ‘여명의 황새울 대작전’이라는 무시무시한 작전이 있었던 날이죠. 그때도 아마 경찰이 1만명 정도 왔고, 하이바(안전모)를 쓴 용역이 900명 정도, 공병대 군인도 1500명 정도 왔습니다. 그날이 대추리 주민들이 주저앉은 순간이라고 봐야 됩니다.”

평택에서도 주민들과 생활하면서 지냈습니까.
 “대추리에서도 2년 반 정도 세를 얻어서 주민들과 살며 미군기지 반대투쟁을 했습니다. 대추리에 처음 갔을 때 마을에서 상을 치르는 모습을 봤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누구는 주방일하고 누구는 상여를 끌고 척척 진행이 됐습니다. 장지에 가니까 이미 또다른 사람들이 미리 묘를 조성해놓고 하관을 하고 묻고, 상여나가는 노래를 부르며 시신을 묻는데 이게 다 지역에 살아있는 민속문화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이 다 깨져버리고 산산조각이 난 겁니다. 강정에서도 민속보존회 같은 단체가 70개 정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해군기지 문제에 찬반이 나뉘어서 단체가 다들 활동을 못하고 있지요. 정부가 국책이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박살을 내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많은 곳에서 투쟁을 해왔지만, 압도적인 공권력을 이기기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부안 핵폐기장 투쟁 때 승리한 경험도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 진 싸움을 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지는 걸 알면서도 정부의 거짓과 폭력에는 저항을 해야 합니다. 지금도 강정 사람들은 긴 세월 투쟁하면서 수없이 감옥을 다녀오고 벌금도 냈습니다. 마을이 완전히 두 쪽이 났습니다. 고통받는 이웃이 있는데 어떻게 놓고 갈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서 불의를 고발하고 이에 저항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저 스스로가 재산이나 단체에 묶여서 자유롭지 못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80년대에 제가 만든 장애인 시설 ‘작은 자매의 집’ 원장에서 은퇴한 것도 아무 걸릴 것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뜻에서였습니다. 앞으로도 주변에 아픈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몸과 마음을 다해 갈 수 있도록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제 자신을 지키는 지침입니다.”



정의와 평화의 투쟁엔 늘 그가 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농민운동, 노동자운동, 국가보안법 폐지운동, 주한미군기지 반대운동, 핵폐기장 반대운동, 철거민운동 등 고난에 처한 사람들의 투쟁 현장에는 항상 문정현 신부가 있었다.
 문 신부는 1940년 조선 말기부터 천주교를 믿어온 집안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동생 문규현, 문현옥도 각각 신부와 수녀의 길을 걸었다. 훗날 문 신부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성인이 된 자신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줬다고 회고했다.
 초등학생 문정현은 초콜릿을 주겠다는 미군을 따라갔다가 섬뜩한 경험을 했다. 미군이 소년 문정현의 머리 위에 깡통을 얹어놓고 ‘표적 맞히기’ 놀이를 했던 것이다. 문 신부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미군을 보면 그때의 상처들이 내 무의식 안에서 반사적으로 분노로 표출되는 것 같아.”(<문학과경계> 2004년 겨울호)
 또다른 인터뷰에서 문 신부는 고등학생 시절에 본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한 편의 영화가 자신을 몹시 괴롭혔다고 말했다. “사제가 노동자의 편에 서서 일을 하면서 당하는 고통을 그린 영화인데, 어쩌면 그 영화가 나의 사제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월간 <말> 1991년 5월호)
 대표적인 박정희 정권의 조작 공안사건인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은 평범한 신부 문정현을 ‘거리의 신부’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당시 문 신부는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들의 주검이 화장장으로 가는 것을 막으려고 장의차 속에 드러누웠다. 그러다가 경찰에 끌려 내려오는 과정에서 아스팔트로 떨어져 무릎 연골이 파열되었고, 이후 그는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1990년대 이후 문 신부는 통일운동과 주한미군기지 반대운동에 천착했다. 1988년 자신의 제자였던 조성만이 한국과 미국의 불평등을 외치며 명동성당에서 투신자살한 것이 계기였다. 미국과의 불평등한 관계를 바꿔보려는 문 신부의 노력은 1999년 ‘불평등한 소파 개정 국민행동’ 창립을 시작으로 대중운동으로 진화했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불평등성에 대한 그의 꾸준한 문제제기는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대규모 촛불시위의 밑거름이 됐다. “효순이·미선이 촛불시위로 한·미 간의 불평등이 굉장히 많이 알려지고 이것이 이라크 파병 반대,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운동으로 연결이 됐지요. 2003년부터는 평화바람 전국 유랑을 하면서 전국 90개 이상 도시에서 불의한 전쟁에 파병할 수 없다는 운동을 했었지요.”
 2008년 1월, 문 신부가 자신이 세운 정신지체아 시설 ‘작은 자매의 집’에서 은퇴 미사를 했을 때 교사들과 아이들은 “신부님 제발 가지 마세요”라며 울었다. 당시 경향신문 사설은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수십년 동안 거리를 떠돌았던 칠순의 노사제를 위해 우리 사회가 할 일은 분명하다. 그가 또다시 나설 필요가 없도록 정의와 평화가 이 땅 곳곳에 넘쳐 흐르도록 모두가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야 한다. 문 신부는 이제 편히 쉴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문 신부에게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할 때가 가장 편안한 시간이다.
 한 강정마을 평화활동가는 “강정 투쟁이 문 신부님의 마지막 활동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70이 넘은 나이도 나이지만, 제주 해군기지 문제를 끝으로 여생을 즐기며 사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뜻도 담긴 말이다. 하지만 문 신부는 “불의를 고발하고 이에 저항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제주도가 ‘평화의 섬’이 될 때까지 문 신부의 강정마을 오전 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Posted by 주간경향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