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대다. 경제도 위태롭고 안보도 외교도 불안하다. 지난 2008년에 이어 2011년 8월 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가 다시 우리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일본과의 외교 마찰이 일고, 북한은 연평도에 포격 시위를 재차 감행했다는 뉴스가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양극화와 고용불안으로 사회적 갈등이 가중되고 있다. 정부의 위기 대처능력과 우리 경제의 앞날에 대한 믿음의 상실로 국민들은 낙담하고 있다.

분노의 불씨도 커져가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민생고와 차별, 빈부격차에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가 발생하고, 일부에서는 파괴와 폭동으로 번지고 있다. 



이런 일들이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일이고 우리와 무관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위기의 상황은 위기 극복의 지도력을 요구한다. 오늘의 위기를 극복할 국가적 리더십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십이 재조명되는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3년 만에 IMF 관리체제 극복
김대중은 1997년 말 불어닥친 외환위기로 부도상태에 처한 대한민국 정부를 인수했다. 정부의 금고는 바닥이 나고, 환율은 치솟고, 시중금리는 30%를 넘어섰다. 은행이 문을 닫고, 기업은 무더기로 도산했다.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쏟아졌다. 그는 취임도 하기 전에 당선자 신분으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투에 매달렸다.
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의 의지를 분명히 하고 우방국의 지도자들을 설득했다. 국민의 합심과 협력을 요청했다. 국민들은 금모으기 운동에 나섰고, 기업과 노동자들은 구조조정과 노사 합의에 호응했다. 그리하여 임기 내에는 어려울 것이라던 IMF 관리체제 극복을 불과 3년 만에 해냈다. IMF에서 빌린 달러를 다 갚고, 취임할 때 39억 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액을 퇴임할 때에는 1239억 달러, 세계 4위의 외환보유국으로 만들어놓았다.

경제난의 최대 피해자인 서민과 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기초생활보장법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회안전망 장치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인내심을 갖고 남북관계를 개선하여 안보 위협을 감소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적 방향으로 관리해 나갔다. 미국과의 전통적 동맹관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최대의 교역상대국이자 한반도 안보와 평화에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중국과 우호적 협력관계를 다져나갔다. 이런 면에서 김대중은 준비된 대통령이었고 성공한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임기 내내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개혁의 방향과 폭을 놓고 보수와 진보 세력 양측 모두로부터 견제와 저항을 동시에 받았다. 그렇지만 인내와 설득의 리더십으로 하나씩 해결해나갔다. 특히 외환위기 극복과 남북한 화해·협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제사회의 압도적인 지지와 협력을 얻어낸 김대중 대통령의 글로벌 리더십은 평가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김대중 리더십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세 가지를 꼽고 싶다. 첫째는 역사와 세계의 흐름에 대한 통찰력과 비전이었다. 김대중은 냉전 종식과 21세기 글로벌 정치·경제의 흐름에 대해 관찰하고 분단 한국이 처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김대중은 옥중에 있을 때나 외로운 망명객으로 있을 때에도 쉬지 않고 공부했다.

이상주의에 치우치지 않은 평화사상가

김대중이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과 관점을 갖추게 된 데는 두 차례의 미국 망명생활(1972년과 1983~85년)과 1992년 대선 실패 이후 영국 케임브리지 생활 등 해외 체류 경험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해외 체류는 단순한 정치적 피난이 아니었다. 미국 체류 기간 중에는 정계·학계·언론계를 막론하고 주요 지도자를 잇달아 만나 한국 민주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미국의 잘못된 정책을 지적했다. 독일 통일의 현장을 여러 차례 답사하면서 흡수통일의 문제점과 과제도 꼼꼼히 메모했다. 아태평화재단의 설립과 남북한 통일방안의 업데이트도 구상했다. 그의 글로벌 식견과 외교 능력은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 경청과 토론을 통해 학습된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둘째는 균형감각과 실용주의다. 그는 평화사상가였지만 결코 이상주의에 치우치지 않았다. 현실에 기초한 정책 대안을 추구했다. 그는 한국이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4대 강국 틈바구니에서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려면 “도랑 양쪽의 풀을 모두 뜯어먹는 소처럼” 균형외교, 실용외교를 해나가야 한다고 설파했다.

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반갑게 악수하고 있다.


김대중의 균형감각과 실용외교의 관점은 한·미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1980년 광주의거 이후 젊은이들 가운데 급격히 반미감정이 확산된 일이 있었다. 미국은 제3세계의 민주화보다 반공이라는 국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고 있으며, 전두환 독재체제를 용인한 미국에 광주의 비극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김대중은 일부의 극단적 반미주의에 대해 경계하면서 반미는 결코 우리의 국익에 부합하는 자세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이로 인해 일부 진보세력으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김대중은 동북아의 군사적 대립을 막고 평화 유지에 건설적인 기여를 하도록 미국을 활용해야 한다는 용미론을 펼쳤다.
김대중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의 존재가 동북아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설득했고, 북의 지도자도 이를 수긍했다고 밝힌 바 있다.

도덕적 권위로 국제적 정치력 발휘

김대중은 글로벌 세계 경제의 흐름과 대책에 대해서도 매우 신중하고 균형된 태도를 취했다. 일각에서는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무분별하게 수용하여 국제 자본과 국내의 재벌기업에게만 유리한 경제구조를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 이런 비판을 많이 한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일련의 구조조정 정책과 해외자본 유치를 위한 개방정책은 신자유주의이고, 신자유주의는 악이기 때문에 김대중의 정책도 잘못이라는 식의 논리는 문제가 있다. 김대중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수레의 두 바퀴로 보고 양자가 조화를 이루는 발전 모델을 추구했다.
그래서 민영화, 규제완화, 금융자율화, 자유무역의 확대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 패키지에 흔히 포함되는 시장주의 정책도 폈지만, 동시에 민주노총의 합법화, 최저임금, 고용평등, 고용보험, 기초생활보장 등 노동인권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도 함께 기울인 것이다.

김대중 리더십의 세 번째 원천은 도덕적 권위이다. 아시아 정치지도자 중에서 김대중만큼 도덕적 권위를 갖고 국제무대에서 정치력을 발휘한 지도자는 흔치 않았다. 경제부국 일본은 한반도의 평화와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했다. 미국에 맞서는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도 마찬가지다.

이희호 여사와 정·관계 인사들이 8월 1일 김대중도서관에서 개막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2주기 사진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김대중은 야당 지도자로서 온갖 박해와 죽음의 위기를 무릅쓰면서도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국내외의 민주인사들과 힘을 합해 싸웠다. 그의 민주화 의지는 국내에 국한되지 않았다. 김대중은 재야 시절부터 서거 직전까지도 버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의 연금 해제와 정치활동의 자유를 위해 국제적 압력을 불러일으키고 모으는 데 앞장섰다. 김대중은 동티모르 독립도 지원했다. 

1998년 인도네시아를 등에 업은 민병대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동티모르인들이 학살의 위기에 처했을 때, 김대중은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중국 장쩌민 국가주석 등을 설득하여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해 압력을 가하고 현지에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도록 하는 국제적 합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400여명의 상록수 부대를 파병하여 동티모르인의 안전과 독립국가 건설을 지원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라모스 호르타 동티모르 대통령은 훗날 “김대중 대통령이 무고한 동티모르인 10만명 이상의 목숨을 살렸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80년 군사쿠데타 세력은 김대중에게 용공과 국가전복 음모 혐의를 씌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협력하면 살려주겠다”는 신군부의 회유에 굴복하지 않았다. 2000년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는데, 1970년 이래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통일의 추구라는 그의 일관된 신념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대중의 도덕적 권위에 대해서는 북한 지도자도 인정한 바 있다. 남북관계의 실질적 개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4대국 정상들과 EU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내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김대중의 국제적 신임 덕택이었다.

김한정<전 청와대 부속실장> 

Posted by 주간경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