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원에 살고 있는 주디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대학에 갈 돈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디를 대학에 보내줄 후원자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주디는 그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단지 후원자의 기다란 뒷그림자만 보았습니다. 주디는 그 사람을 키다리 아저씨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진 웹스터가 쓴 <키다리 아저씨>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릴 적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나에게도 키다리 아저씨가 있었으면’ 하는 환상을 갖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키다리 아저씨는 ‘그림 속의 떡’입니다. 이들의 주변에는 만날 공부하라고 잔소리만 하는 엄마나, 친구들과 겨우 군것질할 수 있는 만큼의 용돈을 주는 아빠, 공부를 해야 출세한다고 녹음기처럼 되풀이하는 선생님만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는 키다리 아저씨는 없고 작다리 아저씨·아줌마만 넘칩니다. 이럴수록 키다리 아저씨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져갑니다. ‘언젠가 누군가 내 앞에 키다리 아저씨가 짠 하고 나타나주겠지’라는 환상입니다.

최근 뉴스 속에 화제가 되는 인물은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과 이국철 SLS그룹 회장이 대표적입니다. 한 분은 멘토로, 한 사람은 스폰서로 키다리 아저씨의 역할을 했습니다. 착하거나 나쁜 것의 차이입니다.

이국철 SLS그룹 회장은 9월 21일 신재민 전 차관에게 상품권과 차량을 제공했다고 주장하며 상품권 구매 영수증과 차량 사진 등을 증거로 제시했다. 워커힐 호텔에서 이 회장과 신 전 차관이 만나는 장면을 찍은 사진도 있다. / 정지윤 기자



한때 문화관광부 장관 후보자에까지 올랐던 신재민 전 차관은 수십억원대의 스폰을 받았다는 의혹에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국철 SLS그룹 회장은 신 전 차관의 기자 시절부터 사실상 스폰서였다고 폭로했습니다.

이 사건을 수사해야 할 검찰 역시 스폰서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는 스폰서 의혹 때문에 청문회에서 낙마했습니다. 게다가 ‘스폰서 검사’라는 유행어가 시중에 떠도는 것처럼 검찰 내부의 스폰서 문화가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장관이나 검찰총장이 될 뻔한 이 두 사람은 결국 스폰서 때문에 나락에 떨어졌습니다. 이런 사실이 크게 보도되더라도 스폰서, 즉 키다리 아저씨에 대한 환상은 멈추지 않습니다. 소설 속 키다리 아저씨처럼 아무 조건 없이 도와주는 착한 키다리 아저씨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다릅니다. 아무 조건 없이 도와줄 착한 스폰서는 거의 없습니다. 이권을 청탁하거나 민원 해결을 요청합니다.

안철수 현상은 스폰서 문화와는 다른 키다리 아저씨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춘콘서트’를 통해 안 원장은 젊은이들의 멘토가 됐습니다. 오로지 취업을 위한 경쟁에 돌진하는 젊은이들에게 그는 정신적 위안을 주는 키다리 아저씨가 되고 있습니다.

소설 <키다리 아저씨>를 끝까지 읽은 후에야 독자들은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고아인 주디가 그렇게 만나보길 기다리고 기다렸던 키다리 아저씨는 스폰서가 아니고 멘토였습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종류의 키다리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윤호우 편집장 hou@kyunghyang.com>

Posted by 주간경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