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지난 9월 2째주 주간경향 추석특집호에 실렸습니다.
KBS 수신료 인상 '제값' 할까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베스트셀러 <1Q84>에는 일본 공영방송 NHK에서 시청료 징수원으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잠시 등장한다. 바로 주인공 덴고의 아버지다. 그는 시청료를 받아내기 위해 어린 덴고를 앞세우지만,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다. 덴고는 어린 아들을 방패막이 삼는 아버지에게 배신감과 미움을 느낀다. 소설의 배경이 된 1980년대 일본에서 공영방송 시청료를 징수하는 일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청료 징수원들과 시청자들의 실랑이는 1994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도 흔한 풍경이었다. KBS 시청료는 도중에 명칭이 수신료로 바뀌고 1994년 10월부터 전기세에 통합됐다. 명칭이나 징수 방법은 바뀌었지만 오랫동안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 수신료는 1981년 이후 30년째 월 2500원이다. 
  30년째 고정돼 있는 수신료를 인상하는 것은 KBS의 숙원사업이다. KBS 보도방향은 정권에 따라 달라졌지만 수신료 인상은 역대 KBS 사장들의 핵심 과제들 중 하나였다. 이 정부에서 임명된 이병순 전 사장이나 김인규 현 사장만이 수신료 인상을 요구한 게 아니다. KBS는 참여정부 시절인 정연주 전 KBS 사장 재임 시에도 수신료 인상을 추진했다. 결국 법제화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KBS 이사회는 2007년 7월 9일 임시이사회에서 수신료를 월 4000원으로 인상하는 안건을 의결한 적이 있다.
  수신료 인상의 관건은 KBS의 독립성과 공영성이다. 수신료는 KBS를 보지 않더라도 내야 한다. 방송법 제64조는 “텔레비전방송을 수신하기 위하여 수상기를 소지한 자는 수상기를 등록하고 수신료를 납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집에 TV가 있는 가정은 모두 내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MBC, SBS, 케이블채널만 보는 사람이라면 억울할 수 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징수를 헌법에 합치하는 행위라고 본다. 헌재는 지난 1999년 수신료 부과에 관한 위헌소원 판결에서 “(수신료는) 공영방송사업이라는 특정한 공익사업의 경비조달에 충당하기 위해 부과되는 특별부담금”이라고 판단했다. 무슨 뜻일까. 판결문을 좀더 들여다보자. 헌재는 “(KBS가) 방송프로그램에 관한 자유를 누리고 정치적 영향력, 특정 사회세력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적정한 재정적 토대를 확립”해야 한다며 “수신료에 관한 사항은 공사가 방송의 자유를 실현함에 있어서 본질적이고도 중요한 사항”이라고 밝혔다. 
  결국 KBS 수신료 징수는 KBS가 공익에 부합하는 방송을 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수신료 인상을 논의할 때 KBS의 공영성과 독립성이 번번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렇다면 지금의 KBS는 수신료 인상을 요구할 수 있는 공적 근거를 확보하고 있을까. KBS 이사회는 지난해 11월 현행보다 수신료를 월 1000원 더 올린다는 방안을 의결했다. 지난 8월 25일에는 KBS 이사회의 여당 추천이사들이 국회를 방문해 ‘월 1000원 인상’ 안을 수용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보개혁진영은 ‘돈 아깝다’고 본다. 지난해 6월 야5당과 민주언론시민연합,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등 512개 시민사회단체가 발족한 ‘한국방송 수신료 인상저지 범국민행동’(범국민행동)은 8월 27일 성명서에서 “KBS 정상화 없는 수신료 인상은 반대한다”고 밝혔다. “정권의 나팔수 노릇이나 하면서 도청 의혹까지 받는 처지에” 수신료 인상을 요구할 자격이 되느냐는 비판이다.
  KBS 보도에서는 정권 비판 보도가 크게 후퇴했다. 일례로 KBS는 지난해 6월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문제가 불거졌을 때 7월 초까지 이 문제를 단 한 차례도 보도하지 않았다. 지난해 민주언론시민연합의 분석을 보면, 지난해 1~3월 한국방송 <뉴스9>의 이명박 대통령 관련 보도 중 26.7%가 우호적 보도였다. 같은 기간 MBC와 SBS는 각기 10.9%와 9.8%였다. 군사정권 시절 흔히 볼 수 있었던 ‘정권친화형 국민동원’ 프로그램도 늘어났다. 지난해 KBS는 ‘법무부 협찬 미녀들의 수다’ ‘한국원전 수출기념 열린음악회’ ‘벤쿠버올림픽 선수단 환영 국민대축제’ ‘천안함의 영웅들 당신을 기억합니다’ 등을 내보냈다. KBS 보도에 문제를 제기한 기자·PD 들은 징계를 받거나 징계성 좌천 인사의 대상이 됐다. 
  각종 기관의 신뢰도 조사에서도 순위가 하락했다. KBS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언론재단 등 여러 기관에서 실시한 신뢰도 조사에서 대체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2009년에는 2~3위로 내려앉았고 지난해 1월 한국언론정보학회 조사에서는 4위까지 떨어졌다.
  진보개혁진영이 수신료 인상 문제에 민감한 것은 비단 KBS의 퇴행 때문만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하반기에 본격적으로 방송을 시작하는 종합편성채널(종편)과 관련돼 있다. 애초 KBS가 원했던 수신료 인상안은 수신료를 월 6500원으로 인상(현행보다 4000원 인상)하고 광고는 ‘폐지’하는 것이었다. 지난해 6월 14일 수신료 공청회에서 KBS는 보스톤컨설팅그룹(BCG)의 진단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수신료 월 4100원·광고비중 19.7% △수신료 월 5200원·광고 12.3% △수신료 월 6500원·광고 폐지 등 세 가지 방안을 내놨는데, 보스톤컬설팅그룹이 앞서 6월 9일에 KBS 이사회에 권고한 방안은 세 번째 방안이었다.
  진보개혁진영은 줄곧 KBS 광고 축소(또는 폐지)가 정권이 종편에 광고를 몰아주기 위해서라고 주장해왔다. 이것을 진보개혁진영의 ‘음모론적 시각’이라고 일축할 수는 없다. 지난해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광고를 폐지하고 KBS 수신료를 인상할 경우 6000억~7000억원의 자금이 종편시장에 나올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지난해 11월 KBS 이사회가 의결한 인상안은 광고를 현행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KBS 이사회 야당 추천 이사들이 수신료 인상에 동의해주는 대신 종편으로 빠져가나는 광고 물량을 차단한 것이다. 그러나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2월 KBS 이사회의 수신료 1000원 인상안에 ‘광고 축소’ 조건을 붙여 국회로 보냈다.
  수신료를 1000원 인상할 경우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광고 물량은 2000억원 수준이다. 4개 종편을 먹여살리는 데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그러나 김유진 민언련 사무처장은 “올해 2월 방통위를 통과한 안에는 2014년 수신료 금액 재산정 및 단계적 광고 축소 계획이 포함돼 있다”면서 “수신료 추가 인상과 추가적인 광고 축소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광고 축소 조건이 붙은 수신료 인상안은 지난 6월 20일 임시국회에서 민주당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지만, KBS 도청 의혹 사건이 터지면서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8월 임시국회에서도 경찰의 도청 의혹 수사가 진전되지 않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수신료 인상안 문제는 9월 정기국회로 넘어가게 됐다.

Posted by 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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