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갑(왼쪽), 최순영씨 / 백철 기자


유신 말기인 1979년 8월 YH무역 노동자들은 사측이 위장폐업을 단행했다며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생존권 보장을 외쳤습니다. 농성 3일째인 8월 11일 경찰은 신민당사에 난입해 농성중이던 노동자들을 강제해산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YH무역 노동자 김경숙씨(당시 21세)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부마항쟁과 더불어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긴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경찰은 김경숙씨가 경찰 진압과 무관하게 사망했다고 밝혔으나, 훗날 진실화해위원회는 김씨가 경찰의 무리한 진압작전 과정 중에 사망한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9월 20일 김경숙씨의 동료인 최순영 부천무상급식센터 운영위원장(60·17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과 권순갑 동방기획 대표(57)를 만나 당시 사건과 현재 과거사 논란에 대한 생각을 들었습니다.


기자 : 현재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과거사 인식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직접 겪으신 유신 말기 상황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최순영 : 1970년대에 이런저런 사건들이 있었는데 많이 묻혔죠 원체 큰 사건들이 많아서.. 인혁당 같은 경우 그때는 말도 못했고 사실 우리는 몰랐어요. 공장 다니느라 신문도 못봤고.

권순갑 : 그때만 해도 그랬죠

최 :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세상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잘 모르다가 나중에 정권이 바뀌고 세월이 가면서 자세히 알게 됐죠. 최근에는 진상규명위원회라던가 이런 데서 (과거사를) 밝히면서 더 알게 되고 서대문구치소 갈 일이 있으면 가슴이 막 진짜...

권 : 너무 분하고 나도 분하고..

최 : 세상에 그 (의문사) 가족들 삶이 어땠겠어요. 엊그제 유신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에 인터뷰를 하러 갔는데 거기서 제가 그랬어요. 생명은 연습이 아니잖아요. 한번 생명이 태어나면 이걸 연습할 수도 없고 정말 그 소중한 생명을 그렇게 억울하게, 하루 아침에 죄도 없는 사람들을 붙들어다가 죽이고, 그 가족들은 사는 것 자체를 힘들게 만들어 놓은 이건 정말 역사의 죄도 그런 죄가 없죠. 그런 사람(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렇게 추앙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이게 너무 분한거야. 우리 사건보다도 인혁당이나 장준하 선생같은 경우는 얼마나 억울할까 이 생각을 하니까 이거 내가 막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세상에. 장준하 선생 아들이 그렇게 힘들게 살았대요.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을 억울하게 죽인 것도 모자라서 그 가족을 힘든 삶을 살게 했던 죄는 어디서 보상을 받아야 하나요. 이미 흘러간 세월을 어떻게 하죠. 나는 그 생각하면 너무 분한거에요. 우리 YH노동자들도 너무 억울하고 우리가 그때 언론에 나오려고 엄청 투쟁을 했고, 죽을 각오를 하고 투쟁을 했었죠.

기자 : 진실화해위 기록을 보면 10·26 사건 이후에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YH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정부 상대로 질의하는 모습도 나오는데요

최 : 10·26이 큰 도움이 됐죠. 우리의 투쟁 이후에 10·26이 난 면도 있지만, 또 그게 우리를 살린거죠. 우리는 어떻게 보면 성공적으로 투쟁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죠.

함세웅 신부님도 그렇고 김재규 명예회복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내가 국회에 있을 때 (10·26 당시 기록을) 한번 찾아본 적이 있어요. 김재규 정보부장이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것 중 하나가 우리의 사건이었죠. 그당시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을 했고, 우리의 억울함이 알려지면서 김재규가 보기에 이게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이거 놔뒀다가는 더 큰일이 벌어지겠구나 (생각을 했겠죠)

기자 : 박근혜 후보 측에서 과거사 사과를 하고 있는데, 혹시 YH노동자들에게 사과할 뜻을 내비친 적은 없었나요

권 : 우리는 전혀 그런 일 없었어요(웃음) 박근혜가 우리를 모를 리가 없을텐데

최 : 다른 사건보다 우리에 대해서는 아마 질려하겠지요(웃음)

권 : 그리고 박근혜가 그냥 사과를 하겠어요. 인혁당이나 이런 데 가서 사과 비슷한 말을 하는데,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사과를 하는게 아니라 이쪽에서 먼저 떠드니까 사과를 하는거죠. 그냥 마지못해 하는거지 그걸 찾아가서 스스로 껴안아줄까요

기자 : 새누리당 쪽에서도 전혀 연락이 없었나요

권 : 누가 와서 사과를 하는 것도 박근혜의 의중이 있어야 대리로 오는 거죠. 아직 대선까지 3개월이 남았는데 (웃음) 

기자 : 이게 30년이 넘은 일이라 지금 20대, 30대 같은 경우에는 YH사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를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쌍용차 사건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회사가 위장폐업을 하고 자본을 해외로 빼돌리고, 거기에 항의를 하니까 경찰이 무자비하게 진압을 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이 죽은 사건인데요

최 : 요새 사람 이해하기 쉽게 한다면.. 그때는 뭐랄까 YH노동자들 나이가 정말 어리고 내가 그때 28살이었는데 나이가 제일 많았어요. 다들 23살 정도였고, 17살 19살도 있었고 이런 여성 노동자들이었어요. (당시 최순영 전 의원은 임신한 상태였다고 함)

권 :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면 쌍용차하고 우리 사건이 시대만 다를 뿐이니 정부나 기업주가 노동자를 탄압하는 것은 너무 비슷해요

기자 : YH무역이 해외에 자본을 빼돌린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요

최 :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명박 대통령이 자본을 키워줬다고 하잖아요. 박정희때는 선성장 후분배라고 해서 수출업체에게 엄청나게 지원을 줬어요. 담보도 없이 YH가 1966년에 직원 10명, 100만원을 갖고 설립을 했는데 내가 입사한 1970년 3월에는 공장이 건평 2000평 짜리였고 노동자가 4천명이었어요. 4년만에 10명자리 회사가 그렇게 된건데 감이 오세요?(웃음) 감도 안오지 않아요? 상상이 안가죠. 담보도 없이 돈을 막 빌려준 결과죠

그런데 더 재밌는건 회사 세우고 7년만에, 1973년에 사장이 10억원을 미국으로 빼돌려요. 100만원으로 시작한 회사가 7년만에 10억원을 빼돌렸어요.

기자 : 엄청난 성장률이었네요

최 : 장용호 사장이 기업이 좀 되니까 국회의원을 하고 싶었나봐요. 그래서 친척을 내세워서 10억원을 가지고 대보해운이라는 다른 회사를 지었어요. 미국에 방송국도 가지고 있고, 호화 주택에 살고 있다고 하네요. 

우리가 1976년에 석탑훈장을 받았어요. 수출을 잘했다고. 그때 300만불을 또 외상을 해가지고 그 돈을 미국에 있는 자기 백화점에 우리 가발을 또 보냈어요

권 : 자기 공장이니까 (백화점에서) 공장에 돈을 안주고 물건만 가져간거죠. 그러면서 이쪽은 계속 구멍이 나기 시작한거죠

최 : 그렇게 20억 정도를 빼돌렸고 친인척이 상무니 뭐니 임원을 해가면서 돈을 받아가고

기자 : 상여금 명목 등으로 또 친인척이 돈을 가져갔다는 말씀이시죠?

최 : 우리는 그때 퇴직금도 연장근로수당도 없었고 상여금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그치?

권 : 난또 상여금이 무슨 사람 이름인줄 알았어(웃음)

기자 : 그런 자세한 정황을 어떻게 알 수 있으셨나요

최 : YH는 이게 너무 적나라하게 밝혀진거에요. 왜 그렇게 됐느냐. 이게 중요한데 장용호가 다 해놓고(미국으로 자본도피를 다 시키고) 월급쟁이 사장을 앉혔어요. 월급쟁이 사장이 와서 보니까 노조 때문에 회사가 어려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까 그게 아닌거에요. 이 월급쟁이 사장이 처음에는 세한칼라도 매입하고 회사를 키우려고도 하고, 노조도 깨려고 노력도 했는데 보니까 돈을 해외로 빼가서 망한 것이지 노조 때문에 망한게 아니다 이거에요. 그래서 자기들 사이에 돈 갚으라고 내용증명이 오가고, (장용호 측에서) 말을 안들으니까 월급사장이 노조에 자료를 다 빼준거야. 그래서 우리가 그 사실을 적나라하게 다 알았지요.

기자 : 그래서 농성투쟁을 준비하신 거군요

최 : 우리는 억울하니까 이 사실을 조합원에게 다 얘기하고 어떻게 싸울거냐, 우리 나가면 취직할 데가 없다 이거에요. 당시 가발이 사양산업이고 중공업이 커갈 때인데 여성 노동자들이 갈 곳이 없고 술집에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그러니까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었죠. 이게 우리가 번 돈인데 그 돈을 해외로 다 빼돌리고 이 억울한 것을 알려야 겠다 이래서 우리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거죠. YH뿐만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도 당하고 있는데 싸워서 억울함을 알려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권 : 70년대만 해도 섬유산업이 많았고 가발업체가 많아서 여성노동자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우리 투쟁이 별로 보도가 안된거에요.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악소리를 안내니까 모를 수밖에 없고 악소리를 안내면 쉬쉬하죠. 사실 우리는 이길 거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그래도 싸워서 이만큼 여성 노동자들이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사회에 알려야 한다, 그래야 다른 노동자들이 우리보다 조금 덜 고통을 받고 살 거다 이래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거든요. 우리가 무슨 더 많이 받고 더 잘 살고 이런 것은 아니었고, 당시에 생각해보면 결정을 참 잘했던 것 같아요.

최 : 그때 언론에 보도 안되는건 다 검열이 있었기 때문이죠. 정권 차원에서 노조 문제는 언론에서 보도를 못하게 막았던 거죠

기자 : 그러다가 신민당사 점거로 일이 커지니까 보도가 나오기 시작한 거군요

권 : 그 전에 얼마나 성명서를 내고 보도자료를 갖다주고 방송국을 다 댕기면서 했는데 그래도 한줄도 안나었어요. 한줄도..

최 : 우리가 이 못된 기업을 어떻게든 방송을 통해서 알려야 한다, 그래야 다른 노동자들도 우리처럼 착취당하는 사실을 알 것 아니냐. 어차피 YH는 다 빼먹은 상태라서 우리가 복직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권 : 텅텅 비었죠(웃음)

기자 : 그래도 이 사건이 알려졌다는건 보도가 되긴 됐다는 것이잖아요.

최 : 그때 동아일보가 좀 크게 자세하게 잘 보도했어요.

권 : 제일 처음에는 기독교방송(CBS)에서 해줬고.

최 : 신민당사 들어가기도 전에 내줬죠(웃음)

권 : 우리는 그거 듣고 얼마나 펄펄 뛰고 울고불며 이제 됐다 이랬었어요.

최 : 기독교방송에서 먼저 우리 소식을 내보냈고, 그리고 신민당사에 들어가니까 동아일보에 요렇게 꽤 크게 내줬어요.(1979년 8월 9일자 동아일보 7면에 '배고파서 못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는 YH 노동자들의 현수막 사진과 2단 기사가 실렸고, 다음날 동아일보에는 1면에 4단 기사로 신민당 대책회의, YH 노동자 점거농성에 대한 성명을 실었음) 그거 보고 우리는 정말 울었어요. 아 이제 우리 싸움은 이겼다. 동아일보가 그렇게 내준 다음에도 딴데선 안냈다가 확 터지고 전쟁터가 됐죠.

기자 : 당시 김경숙씨의 노조 내에서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나요

최 : 그때 상무집행위원이라고 집행위에 있었죠. 막판에 대의원도 했고 자기 부서에서 활동을 열심히 한 친구였어요.

권 : 인혁당 사건을 신문에서 보면서 저는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경숙이가 처음에는 정부에서 자살이라고 지가 뛰어내렸다고 그랬는데, 그게 세월이 30여년 지나고 나서야 타살이라고 판명이 됐잖아요. 너무 비슷하지 않아요? 인혁당도 간첩이라고 그랬다가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고. 그 생각이 딱 들었어요. 경숙이도 자살을 했다 스스로 동맥을 끊었다 말이 많았지만 결국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그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잖아요.

최 : 시체를 막 몇번이나 옮겼다던가 하튼 처음 발표됐던 그 자리가 경숙이가 죽은 자리가 아니었고, 거기는 위에서 떨어질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어요. 우리는 전혀 그때 상황을 알 수 없었고 노조원들이 다 연행되는 상황에서 자세한 상황은 알 수가 없었죠. 경숙이가 죽었다고 나온 자리는 창이 없는 곳이에요. 창이 있어야 떨어죽었다는 말이 맞을 텐데 시체를 짜맞추려고 갖다놓은거죠. 나중에 보면 머리에 상처도 나 있었고.

권 : 저는 밖에 있었고 언니들은 구속됐어요. 자식이 그렇게 됐으니 경숙이 엄마랑 동생하고 같이 현장으로 오다가 수원 어디에서 하루밤을 잤대요. 그런데 경숙이 친척분 중에 흔히 말하는 경찰 끄나풀이라는 말이 돌았던 분이 있는데 그 분이 엄마랑 동생을 따돌리고 혼자 먼저 현장에 온거죠.

최 : 끄나풀이라는건 그냥 우리 이야기고(웃음) 그 친척분이 너무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이라 경찰 회유에 넘어갔을 수도 있다는 거죠.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사건이 종료되어 버린 거죠.

기자 : 나중에 나온 사진들도 김경숙씨 사망 현장사진은 아니고 이후에 나온 사진들이었죠. 그런데 진실화해위원회 전에도 의문사위원회도 있었는데 그때는 왜 김경숙씨 사건이 다뤄지지 않은 것인지요.

최 : 처음에는 YH노조 사람들이 다 구속되고 도망가니까 진실을 밝히라고 말을 못한거죠. 나중에 다들 석방된 이후 김경숙의 죽음을 밝혀내자고 조합원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는 많이 했는데 다들 정확한 사실은 이미 알 수가 없게 된거죠. 그래서 우리끼리 결론내린 것은 자살 타살 여부를 떠나 이건 자본과 국가권력이 (경숙이를) 죽음으로 몰고갔다. 국가와 자본이 죽인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지. 그때는 1980년대였는데 자살이냐 타살이냐 여부를 밝힐 수도 없었고.

권 : 죽인거나 자살이나 마찬가지로 본거죠.

기자 : 김경숙씨의 죽음이 형식은 자살이었다 해도 그 내용은 타살이라는 뜻인가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죽음 역시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최 : 그때도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것이고 지금도 죽이고 있는거죠. 쌍용차 같은 경우에도 국가와 자본이 사람이 죽도록 몰아간다는 거죠. 자살이냐 타살이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원인과 과정을 봐야 한다는 거죠.

기자 :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제가 의문사위 보고서를 봤는데 박정희 시대 사건보다 전두환 시대 사건이 압도적으로 많이 조사가 됐어요. 박정희 시대가 기간도 2배나 길고 긴급조치로 옥고를 겪으신 분도 많은데 신청 건수가 적은 것이 의아스러웠고, 의문사위가 활동할 기간에는 김경숙씨 사건을 의문사위에 올리지 못하게 막지도 않았을텐데 올리지 않은 이유가 나름 있었을 것 같아요.

권 : 사실 그런 면이 있어요. 같이 싸우다가 우리 동료가 죽었지만 다들 먹고 살아야 하는 상황이 있고, 옛날 일을 파헤쳐서 진실규명을 하기엔 우리 힘으로 역부족이었죠. 나중에 진실화해위에서 밝혀준 것은 고마운데 사실 우리 힘이 역부족이었다고 보고.

최 : 신청을 안한건 아니고

권 : 처음에 우리가 징역살고 나와서는 신청할 수는 없었고 의문사위는 아니고 민주화운동으로 신청한 적은 있어요. 의문사위로는 신청을 안했던 것이고. 

기자 : 진실화해위 보고서를 보면 YH 조합원들이 농성 이후 블랙리스트에 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쌍용차 해고자 분들도 경력에 쌍용차에서 일했다는걸 일부러 적지 않는다잖아요.

최 : 그때 1970년대에 블랙리스트가 있었죠. YH 노동자들도 당연히 그 경력은 안썼고

권 : 안쓰려고 해도 어떻게든 그걸 알아요. 다 알더라고(웃음) 그리고 (YH에서 일했다는) 경력을 쓰는 바보가 어딨겠어요 취직해야 되는데. 농성 끝나고 우리가 경찰서로 나눠져서 끌려갔어요. 조사 다 받고 나서 조합원들 기숙사까지 데려와서 짐 싸게 하고 고향 마당까지 데려다주고 그 지역 경찰을 붙여 경호를 서게 하는 거에요. 나이가 대체로 23~25살 정도 됐는데 그때만 해도 집에서는 시집이나 가라고 하죠. 그래서 결혼을 해야겠다 싶어서 선보러 가는데 경찰이 따라나가기도 했어요. 밤중에 서울로 도망온 사람도 있지만 그 당시에 결혼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최 : 취직은 꿈도 못꿨지.

권 : 언론에 이름 난 사람이라면 (블랙리스트에 올랐을지) 몰라도. 보통 사람들은 사실 YH사건을 별나라 사건으로 생각하지 내 옆에 있는 처자가 연루됐다고 생각은 안해서 시집은 갈 수 있었죠.

기자 : 신문에 나온 분들 말고 다른 분들은 주로 결혼을 많이 했다는 건가요? 그래도 요새는 사실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뒤늦게 밝히는 일도 있겠네요

권 : 지금도 숨기고 사는 사람도 있어요. 그게 그렇게 자랑스럽지 않다고 해서.. 특히 남편이 공무원 쪽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죠. 그래도 (YH 노조)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은 (과거를 숨기거나) 안그래요. (순영)언니가 국회에도 있었으니까 연락하려고 했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연락이 없는 사람도 있어요. 눈을 감고 살지 않는한 연락을 할 수는 있었을텐데

최 : 많은 동료들한테 연락을 돌리고 해서 만났거든. 대개는 자랑스러워하죠. 자기가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 줄에 설 줄 알았는데 스스로를 대견스러워 하더라고요. 그 나이에 이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쪽 길에 나섰는지 스스로를 대견하다고 그러는데 일부는 연락도 없고. 보고싶은 친구들도 있어요.

기자 : 사건이 터진지 3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당시를 말하지 않는 분들은 어떤 생각에서 그런 것일까요. 당시 사진을 보면 경찰 진압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피를 흘리고 그런 모습도 나오는데

최 : 악몽으로 생각하겠죠. 얼마나 악몽같았겠어요. 그래도 싸울 당시에는 한 사람도 반대하지 않고 이탈자가 없었다는 것이 우리는 자랑스럽고 그래서 싸움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해요.

권 : 우리 공장이 면목동이었고 신민당사가 있는 곳은 마포였는데 중간에 빠지려면 얼마든지 빠질 수 있었어요. 따라가지 않을 수도 있는데 한명도 탈락자 없이 다 들어갔죠. 기숙사에 몇명 남은 사람도 있는데 그건 우리가 조직적으로 남겨둔거에요.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탈한 사람은 없었어요

최 : 기숙사에 사람을 남긴 것은 기숙사에 조합원들이 다들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전략을 짠 거죠(웃음) 그때 기숙사에 남았던 사람들이 녹음된 노래를 크게 같이 틀어놓고 다들 기숙사에 남아 있는 것처럼 했죠. 싸움을 처음 시작할 때 조합원 한 사람도 흔들림이 없었고 동료들이 대견하죠. 어린 조합원들도 참 대단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투쟁을 할 수 있었고 그 점 때문에 투쟁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거죠.

기자 : 신민당사 진압과정을 보면 경찰폭력이 엄청난데, 조합원들이 경찰 폭력을 이전에도 경험했는지 궁금하네요.

권 : 전에도 공장 강당에 모였는데 경찰이 투입되서 끌려나가고 맞고 그런 적이 있었어요.

최 : 다들 한번씩은 경찰을 경험했는데 그게 무서웠다기보다는 악이 났어요. (경찰이) 막 가슴도 주무르면서 끌고 나가는데 악이 나서 저것들 정말 못된놈들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고

기자 : 진실화해위 보고서에는 당시 진압에 참여했던 경찰 중에 진압상황을 증언한 사람이 나오는데, 나중에 과거를 사죄하러 온 사람은 없었나요.

최 : 그런 사람 없었어요. 이제와서 말하는 것도 무리한 것이고.

기자 : 또 당시 자료를 보니까 경찰 담당하는 내무부장관이 자기들이 무리하게 진압을 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국회에서 한것도 나오는데요

최 : 그때 국정질의에서 누구 의원이 질의를 했고 답변을 받아냈죠. 그걸 언론에서 보고 우리는 막 좋아했죠(웃음) 그땐 국회에서 그런 질문을 안할 때였는데. 물론 우리를 강제진압했다고 처벌받은 사람은 없죠. 잘했다고 상을 줬을 수는 있겠죠. 그렇지 않겠어요?(웃음) 김재규가 보니까 YH에서도 저렇게 싸우고 있고 신민당사에서 난리도 나고 부글부글 끓는게 눈에 보이니까 김재규가 이대로 보면 폭동이 나겠다 싶었고, 김재규가 말을 해도 박정희가 막가니까 그렇게 했겠죠. 그때 당시는 요정이라고 불렀던 곳에서

권 : 고급 룸살롱이지.

기자 : 지금 보면 유신시대 비판하면 배가 불렀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박근혜 후보가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에게 죄송하다는 말도 했는데요. 어떻게 보면 김경숙씨야말로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최 : 내가 늘 주장하는 것은 산업화라는 것은 수출하는 업체 자본가들을 주로 보호하는 방향으로 갔는데 그게 잘못된 거라는 거죠. 그때 분배가 잘됐으면 튼튼한 경제가 됐을 거고 지금처럼 흔들리는 경제가 아녔을 거에요. 그런데 오히려 자본가들을 두둔하고 보호하고, 자본가들은 자기 배불리기만 하면서 양극화가 심해지고 노동자들은 제값도 못받고 가난해지는 거죠. 자본가들도 번 돈을 재투자하기보다는 자기 부를 불리고 그러니까 경제가 조금만 외풍이 불면 와르르 무너지는 구조가 된거죠. 우리가 지금 박정희 재평가를 하고 있는데 경제 성장에 있어서도 당시 분배를 골고루하고 노동자들을 잘살게 했다면 지금같은 경제구조가 되지 않았을 거다라고 주장하는 거죠. 기업도 제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분배를 했을 거고. 토대가 잡히지 않은 경제구조, 밑이 엉망이다 보니 외풍에 쓰러지고 그런 상황에서 큰 집을 지으려고 하지만 바람막이도 무너져 내리고 이런 구조라고 봐요. 박정희 경제성장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죠.

권 : 박정희 시절에 경제가 잘살았다고 말이 많은데 뭐빠지게 노예같이 일했어요

최 : 지금도 가난하고.

기자 : 17대 의원활동 하셨을 때 박근혜 의원도 지나가면서 보셨을 것 같은데 유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대화라도 나눠보신 적 있나요

최 : 전혀. 그냥 이렇게 지나가면서 본것 정도고.

권 : 박근혜가 지금 표얻으려고 하는 쇼지. 옛날에는 아이고 공주였지 왕공주. 예전에면 안그랬을텐데 지금 보니까 가방도 스스로 매고 우산도 자기가 들더라고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한번도 안그랬던 사람이

최 : 70년대에는 박근혜를 영애라고 불렀는데 나는 영애가 이름인줄 알았어요(웃음)

권 : 옛날부터 박근혜를 둘러싼 이야기는 참 많았고, 박근혜가 이제 와서 과거사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을 하는데 정치인들이 뭐라고 해도 늘 거짓말이었고, 박 후보도 어떻게 해도 용서는 안되요.

기자 : 그래도 무조건 용서해줄 수 없다고 하기보다는, 이정도는 과거사에 대해 사죄를 하면 나도 인정하겠다. 그런 생각은 없으신가요

권 : 절대 그렇게 안하겠지만 박 후보가 후보직을 사퇴하고 국민들에게 죽을 죄를 졌다고 사죄하면 용서할 수도 있어요. 그정도로 진실성을 보여줘야죠

최 : 역사는 평가를 제대로 해야 발전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본인이 역사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하다 보면 아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정치를 했구나 알거 아니에요. 그런 평가를 하고 나서 (과거사에 대해) 사죄를 하고 사퇴를 하라는 말이죠.

권 : 이 시점에서 아버지의 잘못을 딸로서 책임지고 물러나겠다 그렇게 나와야 하는거죠

최 : 그런 진실함이 필요한데 여기저기서 장준하 선생, 인혁당 유가족에게 용서를 해달라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제스쳐고 쇼로 보이는거죠.

권 : 어떤걸 해도 용서가 안된다고 말한건 박근혜가 사퇴는 안할거거든요. 여기 분들에겐 사과마저도 한 적이 없잖아요. 사과는 무슨 사과.

기자 : 장준하, 인혁당 사건이 다시 이슈화가 되고 있는데 새누리당에 찾아가서 YH사건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혀라, 국가폭력으로 사람이 죽은 사건인데 이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달라고 요구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최 : 저는 뭐.. 장준하 선생이나 인혁당은 우리보다 더 억울하죠. 자식까지도 힘들게 됐고 이거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질거냐 이거죠. 아버지는 죽임을 당하고 자식들은 어렵게 살았는데 박정희 시절의 일들에 대해 딸로서 책임을 져야죠. 그런 취지에서 아까 사퇴를 말한 것이고. 찾아가서까지 얘기해볼 생각까지는..

권 : 그런 생각은 못해봤고 우리도 다 이젠 지쳤어요.

Posted by 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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