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숙씨(왼쪽), 정신영씨(오른쪽) / 백철 기자


9월 19일 의문사 피해자 정법영씨가 살던 집에서 정씨의 동생 정신영씨(50), 어머니 조정숙씨(77)를 만났습니다.

정법영 의문사 사건에 대해서는 아래 기사를 참조하세요 (-> 2012년 오늘 '의문사 망령'은 살아있다(주간경향 991호))

(정법영씨의 친구 김창규 목사 인터뷰도 함께 보세요.)


기자 : 최근 박정희 시대의 의문사 사건들이 재조명되고 있는데 인혁당, 장준하 사건 외에는 언론에 잘 나오지 않습니다. 아예 안밝혀진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밝혀진 사건에 대해서도 크게 회자되고 있지는 않은데 실제 유가족 분들 생각은 어떠신지 들으러 왔습니다

정신영 : 제 형님(정법영)이 돌아셨을 때가 78년이고 전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형님은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때였고. 그때가 군부, 유신정치 말기인데 요새 언론에 과거사 나오는걸 보면 당시가 막 연상이 되죠. 지금 상황은 옛날 유신정권을 새롭게 다시 소생시킬수도 있는 그런 씨앗이 나타난 거죠.(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지칭한 것) 본인은 부인을 하지만 그렇게 쉽게 부인이 되나요. 부모에게 배운게 그런 정치인데. 부모에게 보고 배운 정치가 다시 나올까 걱정이 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극구 반대를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식의 정치가 또한번 자행되면 우리 민주정치는 완전히 후퇴될 거고요. 지금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진짜 좋아진건지. 경제구조가 정말 민생은 더욱 피폐해지고 빈익빈부익부가 극에 달하는 상황으로 가고, 이명박 정부 5년간 복지는 죄다 자르고 이런 상황에서 민생을 챙기고 경제를 민주화하고 국민을 잘살게 만들 수 있다. 이런 말을 믿을 수는 없는 것이죠.

기자 : 박근혜 후보 측에서 유가족들이 보시기엔 부족할 수도 있지만 이를테면 장준하 선생 유가족이나 인혁당 유가족들에게 어느정도 과거사 사과로 보일 수 있는 발언도 하지 않았습니까. 박근혜 후보가 그래도 과거사 반성한 태도는 어느정도 인정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 : 지금 과거사를 역사에 판단에 맡기겠다고 하는데 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지울 수 없는 기억이죠. 역사의 판단도 역시 기득권자 몇명이 판단을 내리고 그걸 가지고 교과서를 쓰는데 그걸 믿을 수 있겠냐는 말이죠. 우리는 지난 사건을 가슴에 묻어두고 사는데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없고, 반성한다는 말도 믿을 수가 없죠

기자 : 혹시 새누리당 쪽에서 정법영 사건에 관해 두분 찾아와서 과거사 사과 발언이라던가 이런 것을 한 적은 없었나요

조정숙 : 일체 없어요. 그런거 한번도 없었지.

정 : 그런 사과가 있었다면 민주화가 다 된것이게요? 옛날 박정희 정권, 군부독재와 연결되어 있는 현재 이명박 정부가, 그 정권이 사과를 할 정도면 대한민국은 민주화가 다 된 나라겠네요?

기자 : 어머님께서는 요새 신문이나 TV에 과거사 문제가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조 : 장준하 선생일 그건 진짜 박정희가 잘못 했지.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죽일 수가 없는 거지. 그리고 과거사를 역사의 판단에 맡긴다고 하는데 박근혜가 사죄를 해야지. 아버지가 그렇게 옜날에 했으면 딸이 진심으로 사죄를 해야지. 바라는건 진심으로 사과하는 거에요.

정 : 유신 말기 때는 말도 못하고 지내고 군부정권의 억압이 극에 달하는 상황이고, 그런 정권을 운영해온게 박정희잖아요. 그때 향락을 다 부린 기득권들은 그 시절이 좋겠죠. 자기 뜻대로 지배하고 권력을 휘두르고, 말 한마디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이런 사람들인데.. 어머니 얘기로는 진심으로 사죄하면 된다고 하지만 정말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겠느냐 이런 생각이 들어요.

조 : 못하지.. 저희 아버지가 저리 한걸 다 지가 어떻게 사과를 하겠어..

정 : 보상하고 엎드려서 절한다고 해서 사과가 되겠는가. 군부정치에서 시작되어 내려온 그 정신적인 세계를 다 끊을 수가 있겠는갸 이런 생각이죠.

물론 박정희 시대 18년 동안도 좋게 평가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죠. 아무것도 없는 시기에 경제를 좋게 만들었다던가 이런저런 기반을 만들어 놓고 이런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런데 그 이면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을 겪고 당한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에요. 당사자들은 지난 과거사를 봐줄 수가 없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없는데 그걸 돈 좀 준다, 보상 좀 한다고 해서 우리 마음 속에 남은 것을 지울 수도 없죠.

기자 : 일단 의문사위 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이야기를 이어가보죠. 여기 보면 당시 가족들이 살던 집에 형사들이 직접 들어와서 살았다는 말도 나오는데요

조 : 아이구 뭐 여기서 형사들이 죽치고, 여기서 아예 잤어요. 형사들 둘이 들어와가지고 밥까지 해먹으면서 여기서 아예 잤어. (인터뷰를 하던 부엌과 거실을 가리키며) 여기서 우리 목사님(정진동 목사)을 가운데다가 놓고 뒤에 한명 앞에 한명 이렇게 있었어요.

기자 : 왜 그렇게 형사들이 정진동 목사를 데리고 잠까지 잔거죠?

조 : 목사님이 밖에 못나가게 하려고 하는거죠. 그게 바로 이집(현재 거주중)이에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까짓거 암만 형사들이 있어도 벌떡 뛰어 나가서 그냥 서울로 가버리겠네. 그렇게 말했더니 형사들이 잠도 제대로 못자더라고.(웃음)

정 : 1972년부터 담당형사들이 교체되어 가면서 이 집하고 아버님 움직이시는걸 24시간 감시를 하고 보고를 올렸죠. 형님 이야기부터 해서 모든 이야기가 아버님 중심으로 1972년부터 시작된 것인데, 형님 돌아가신게 1978년 7월 8일이니까 몇년만에 가족 중 하나가 죽어나간거죠.

조 : 집안까지 가고 가고 그런건 저도 처음 봤슈.

정 ; 요 앞집이 지금은 보수를 했는데, 형사들이 그 집을 얻어서 거기서 자면서 감시를 하고, 저쪽에 동산이 있는데 거기서도 감시를 하고. 박정희 시대에 제가 고등학생이고 동생(막내 정세영씨)이 중학생이었어요. 그런데 학교 다녀오면 느닷없이 형사들이 가택수사가 진행하기도 했죠.

조 : 그때 여기저기 쫓아다니며(정진동 목사, 정법영씨의 투쟁현장 등에 갔다는 의미) 살았는데, 엄마 없는 새에 형사 둘이 왔다 갔다고 그래요. 사람 없는 사이에 가택수사를 다 해서 간거야. 그렇게 하고 별짓 다했어. 여기 와서 잠도 자고 지키고 고기도 궈먹고 그랬어. 어느날 밤에는 사과를 깎아먹으려고 부엌에 나왔는데 창밖에 밤중에 형사 얼굴이 쑥 나타나더라고. 내가 사과를 확 던져버리려고 한 적도 있어요. 집 반대편에서 얼굴이 나오기도 하고 시도때도 없이 (형사들이) 나타났어요

정 : 하도 웬수처럼 따라다녀서 개중에는 목사님하고 친해진 사람도 있었죠(웃음)

기자 : 정진동 목사 있었던 산업선교회 문앞에서도 형사들이 지키고 있었다는 말도 있는데요

조 : 그게 단식할 때인데 문앞에 아주 그냥 둘인가 셋인가 지키고 있었어. 김xx이가 지키고 있었는데 우리가 유인물을 써서 나오잖여. 그런데 가지고 나올 수가 없어요 지키고 있어서. 그래서 한번은 세사람이 신문에다가 그걸(유인물)을 뚤뚤 말아가지고 나왔어요. 김xx이가 "저거 성명서 가져가는 거다" 소리를 치고 날 잡으려고 확 뛰어왔단 말이여. 내가 확 도망을 가니까 나보고 진짜라는 거에요. 내가 밖에다가 (들고 있던 신문 뭉치를) 확 던지니까 그냥 신문이잖여 암것도 없는 신문.(웃음) 김xx이가 '에이 신문이네' 그랬는데 (다른 사람이) 성명서 가지고 나온거 몰랐나봐. 바보들이여. 내가 이 xx들아 그랬지. 목사님 단식할때 성명서 돌리고.

정 : 그때 단식이 오래돼서 사람이 죽어나갈 판이라 형사들이 건물을 임대하고 앰뷸런스는 대기시키고 매일처럼 누가 들어가고 나오는지 체크를 했어요. 그때 함석헌옹이 와서 강연도 하시고 다른 목사들도 와서 강연을 하고 청주 시내가 발칵 뒤집혔죠. 거기서 한명이라도 탈수증세라도 있으면 바로 병원 이송을 해야되니까 그런 책임도 느꼈을 거에요. 누구라도 사람 하나 죽으면 큰 사회문제가 되니까 24시간으로 감시를 했겠죠.

기자 : 정법영씨의 경우 김창규 목사는 100% 경찰이 죽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의문사위 보고서에는 경찰이 정법영씨에게 자주 접근한다던지 압박을 견디지 못해서 농약으로 추정되는 약물을 먹고 사망한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결론을 내렸는데요.

조 : 우린 농사 안지었고 그래서 농약도 없었어요. 누가 농약이라고 그랬는데 농사를 안짓는데 농약이 어딨어요.

정 :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사실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때 정황을 살펴보면 아버님(정진동 목사) 하시던 산업선교회에서 민중문제 해결을 위해 단식을 들어갔어요. 정부에선 어떻게든 이 단식을 와해시키지 않으면 일이 커져서 사회문제가 된다는 것이고, 형사들로부터 가족 중 하나 누구 조심하라는 말이 나왔고, 그리고 일주일 뒤에 갑자기 형님이 돌아가셨죠.

기자 : 또 의문사위 보고서를 보면 정법영씨 사망 며칠 전에 건장한 청년들이 술에 취한 정법영씨를 집 대문 앞에 데려다준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보셨나요.

조 : 누군진 모르지.

정 : 그때 아버님께서 산업선교회에서 단식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거기가 죽느냐 안죽느냐가 제일 문제였어요. 가족들도 거기 다 달라붙었고, 우리 형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체크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땐 형님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가 없죠.

아까 설명드린 정황에서(알 수 없는 사람이 술 또는 약물에 취한 정법영씨를 집 앞에 놓고간 상황이 반복되었다는 의미) 형님이 돌아가시고 결국 아버님(정진동 목사)도 단식을 종료를 하셨고 그런 상황이었죠. 당시 시대상황이나 여러가지 정황, 아버님께서 하시던 일들을 봤을 때 법영이형이 의문사된 것만은 확실하죠. 법영이형을 우리 집 대문까지 데려다준 사람이 양심고백을 하기 전에는 어떻게 뭐라고 얘기할 수가 있을까요. 아무리 시대가 변했지만 의문사의 경우 의문사를 시킨 당사자 한사람의 양심선언이 나오지 않으면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게 사실이죠. 대한민국 전체에 밝혀지기 어려운 일들이 많을거에요.

조 : 아이구 그때 생각하면 나도 어떻게 싸웠는지. 교도소도 진짜 많이 돌아다니고 그랬는데

기자 : 사실 당시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정법영씨보다는 정진동 목사님이 더 문제였겠죠. 예를 들면 장준하씨 같은 경우는 본인이 의문사가 된 것이잖아요

정 : 장준하 사건은 타살이라고 봐야죠. 장준하 선생이 아버님하고 친분도 엄청 두터웠고 치열하게 민주화를 위해 싸운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고 정신력이 약한 사람도 아닌데 돌아가셨다고 하니 우리들도 다들 깜짝 놀랐죠. 그것도 양심고백이 나오지 않으니까 결국 어떻게 결론이 나오지 않잖아요

기자 : 정진동 목사한테도 장준하 사건처럼 직접 본인을 의문사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나요.

정 : 한두번이 아니었죠. 아버님은 이런저런 민중문제, 억울한 사건을 도우러 다니기 때문에 죽이겠다면서 연행을 하고 감시하고 그랬었죠. 경찰에 조용히 끌려가서 협박도 당하고 이랬었죠. 가족들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님이 없어지고 그러면 이미 잡혀서 들어가 있을 때도 있어요. 아버님이 워낙 투철하시니까 24시간동안 저쪽에서도 협박하고 신문하고 그러다가도 나중에는 잘 멕여서 내보낼 수밖에 없지요(웃음)

조 : 정말 정목사님이 농민을 위해 열심히 데모도 하고.. 사실 남의 일만 전부 해준거죠 뭐.(웃음) 여러가지 사건도 해결하고 열심히 사셨는데 가정 일은 저참이고 남의 일만 다 한거죠. 20년 정도 힘들었어요(웃음) 그때 목사님이 청주시의 민생문제를 많이 다뤘거든. (정진동 목사가 뛰어든 노동자, 빈민운동 기록물을 보여주며) 이렇게 많은 일들에 목사님이 뛰어들고 해결을 했는데 박정희가 이걸 보면 뭐라고 할지..

정 : 생각난게 있는데 형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쓴 글이 있어요. 그때 당시 신흥제분, 조광피혁에서 노동자들이 억울하게 돈을 못받고 있었던 상황이었죠. 아버님께서도 그 일 때문에 단식을 시작하신 것이고. 형님도 어디 이걸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까 직접 글을 써서 여기저기에 보내기도 하셨어요.

기자 : 자녀분이 셋이나 계신데 그 난리통에 어떻게 키우신건지 궁금하네요.

조 : 나도 몰라요. 나도 누가 데모하러 나간다고 하면 전부 다~ 쫓아다니고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나요. 형사들하고 싸우면서 "니 주먹으로 우리 애들 때리지 마라" 이러면서 엄청 싸우기도 했어요.

기자 : 그런데 어머님과 동년배인 분들은 박근혜 후보나 새누리당을 많이 지지하지 않나요?

조 : 동네 아는 엄마들 만나면 대선 이야기도 하고 그러는데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아주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뭐라 할 순 없지만 답답하죠.

정 : 박정희 말기가 되면 기득권층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분위기를 몰았어요. 엄청 무서웠죠. 그 시대에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이렇게 잘살게 됐다 이런 관념을 콱 심어놨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처럼 직접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박정희에 대해 좋게 생각할 수도 있죠.

기자 : 제가 일전에 취재한 내용 중에 어떤 것이 있었냐면, 공화당 활동도 하고 새마을 지도자 활동도 하던 농민인데 그분이 겉으로는 공화당 활동을 하고 나서 집에 와서 자기 일기장에는 박정희도 부정선거를 한다, 이승만과 다를게 뭐냐 이런 비판을 쓴 사례도 있었어요. 그리고 그 내용 연구한 교수님 말로는 당시에 드러내놓고는 못하지만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1960~70년대를 좋게 추억하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정 : 요새 힘들잖아요. 우리나라가 제3세계와 비교하면 잘살기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죠. 옛날은 지나간 추억이고 향수가 있는 것이니까 그때는 잘살았었던 것 같다 그런게 아닐까요.

조 : 그때 통일벼 그거가지고 지금까지 박정희땜에 먹고살았다고 어휴 엄청 답답혀.. 그거 먹지도 못혔어.. 그때 잘살긴 뭘 잘살아요. 식량이 없어서 절절 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기자 : 아까 신영씨는 박정희 시절도 좋게 평가될만한 부분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정 : 박정희가 18년을 독재했잖아요. 그 18년간 개발성장도 하고 5개년 계획을 한 것은 긍정적인 면이라고 보고 부인을 안해요. 새마을운동이나 경부선으로 나라의 틀을 다진건 맞죠. 어떻게 보면 그당시에는 경부선이나 새마을운동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을 수 있지만 지금도 그걸 토대로 우리나라 지위가 좀 많이 올랐죠.

근데 그당시는 정부에 협조한 사람이 잘살았어요. 돌아다니며 큰소리도 치고, 말 한마디에 이장이 되고. (정법영씨 사망한) 1978년 말기로 가면 정말 극악무도하게 상황이 돌아가고 그런 상황 중에서 (형이) 죽은 거죠. 박정희가 잘했다면 왜 총맞아 죽었겠어요. 보다보다 못하니까 그런 사건(10·26 사건)이 터진 것 아닌가요. 군부독재가 성장가동과 토대를 쌓고,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정말 소수만 반대를 했으면 (박정희가) 죽을 이유가 없고 영웅이 됐겠죠. 보다보다 못해서 그 내부도 얼마나 힘들었으면 총으로 쏠 생각을 했겠어요.

조 : 그랬더니 더 무서운 전두환이가 나와서 엄청이 죽였잖여.

정 : 내가 대학 들어갈때 광주가 터졌는데(1980년 광주 민주화항쟁을 뜻함) 진짜 무서웠죠.

조 : 광주 터지고 집에 갈때 동생이 대전교도소에 있어서 내가 혼자 갔어요. 대전교도소에서 동생 면회를 하려는데 면회를 안시켜줘서 막 싸웠어요. 그래서 내가 "너 전두환이가 사람 많이 죽이니까 전두환이 무서워서 면회 안시켜주냐" 또 막 그랬죠. 교도관들에게 "내가 동생 면회가는데 너가 왜 xx이냐"이러면서 전두환을 막 xx놈이라고 욕하고 그랬어. 어진 대통령이 들어서야 그 민족이 잘사는건데 어디서 사람을 죽이고 대통령을 하느냐고 그랬어요.

정 : 아버님도 광주항쟁과 관련이 있어서 김대중 정부 들어서 유공자가 되셨죠.

기자 : 다시 원래 사건 이야기를 해보죠. 김창규 목사님은 자신하고 정법영씨랑 형동생하는 그런 사이였다는데, 김목사님 말로는 정법영씨가 자식들 중에 특히 아버지 활동을 존경하고 같은 길을 갔으면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머님께서는 그때 당시 큰아들 모습을 보고 좀 걱정이 되진 않던가요

조 : 아이고. 목사님은 여기서 데모하고, 아들은 또 저쪽에서 돌아다니고. 그러면 여길 쫓아다닐 수도 없고 저길 쫓아다닐 수도 없고 그걸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많이 힘들었죠.(웃음)

정 : 우리 형님 사건의 실체를 밝히려면 아까 말씀드렸듯이 양심고백이 있어야 할 것이고, 정보기관 자료가 공개되어야죠. 장준하 사건 때는 국정원 자료가 일부 공개됐다고 하는데, 장선생하고 아버님이 좀 다른 점도 있어요. 장선생님은 서울에서 주로 정치적 활동을 하셨고, 여기 목사님(정진동 목사)의 경우에는 정치활동보다는 빈민문제 노동자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집중이 되어 있었죠. 목사님 생각하시기에는 정치보다는 민중이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했으니까 그쪽으로 온통 선교방향이 다 집중돼 있었고, 정치적 탄압의 방식도 조금은 달랐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장준하 사건처럼 정보기관의 세세한 동향보고는 없었을 수도 있었다는 의미)

기자 : 당시 신영씨도 신학교를 다니셨다면서요. 

정 : 저는 한국신학대 들어갔었고 형님은 청주신학교를 좀 다니다가 마셨죠. 저는 뒤늦게 대학 들어가서 거기서 또 데모를 했죠.(웃음) 옛날 신문을 보시면 아실텐데 그때 한신대 폐교령이 나온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대학원생까지 몽땅 나와서 데모를 했죠. 그런 와중에 저는 6~7개월 정도 기숙사를 살다가 내려왔죠. 전공도 완전히 바꿨어요. 원래 영문학 전공이었는데 아버님의 길을 걸을까 생각하면서 뒤늦게 신학을 또 했죠.

기자 : 그럼 목사 안수도 받으시고?

정 : 하하 아니요. 원래 그렇게 하려다가 미국에 있는 신학교에서 석사과정 마치고 지금은 내려놨어요. 석사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오니까 아버님이 쓰러지셨죠. 그래서 2005년 쯤 공부한 걸 손을 놨고. 뭐 지금이라도 공부는 더 할수 있습니다만.(웃음)

기자 : 오늘(9월 19일) 보면 안철수 교수가 대선출마 선언을 방금 전에 했는데요, 박근혜 후보에게 본인이 가진 과거사 인식을 정확히 밝히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정 : 이번 선거는 과거사 등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선거라고 봐요. 옛날에는 우리가 어떤 사회문제에 대해 유인물이라도 뿌리려고 하면 방해를 받기도 하고, 대학생들이 공부하고서 직접 노동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들에게 노동법을 가르쳐야 하는 시대였죠.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지식이 이렇게 많지만, 저같은 경우야 아버지 살아오는 과정을 봐 왔으니 사회의식이 좀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래도 보통 사람은 사회 의식이 많다고 볼 순 없겠죠. 요새는 이기주의나 냉소주의가 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저같은 입장에서는 무지 답답하죠. 박정희 수호세력이 민주정권 김대중, 노무현 정부 넘어오면서 그동안 권력을 다시 쟁취하기 위해서 얼마나 참았겠어요. 하지만 권력에 당해온 우리같은 사람들 입장은 전혀 고려가 안되고 있죠. 박근혜 후보도 그동안 많이 바뀌었겠죠. 어떻게 아버지와 자식이 똑같겠어요. 하지만 박근혜 후보가 정치를 다 하는건 아니고 밑에 있는 수구세력이 정권을 만들어 갈텐데. 어떻게 보면 지금보다도 더 안좋은 정권이 들어설 수도 있겠죠. 지금보다 민주주의가 더 나빠지면 더 큰 사건이 생길 것이고요. 시대가 바뀌었다고 너무 맘놓고 있을 수는 없는거죠.

기자 : 그런데 사실 민주정권 10년간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조 : 김대중 때 그걸 어떻게 화해를 해..(전두환과의 화해) 사람을 그렇게 엄청나게 죽였는데. (과거사 청산을) 할 수가 있었는데 안한겨

정 : 역사를 드러내고 폭로할 수 있는 정치가 들어섰지만 안한건지 못한건지는 모르겠네요.(웃음) 앞으로가 문제죠. 정말 자기 이익 챙기지 않는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나오고 정의로운 정치를 하기를 바라는 거죠. 그런데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이 될지는..

조 : 10년이면 많이 바꿔 놨어야 되요. 목사님도 김대중 대통령 되고 나서 좋아지겠지 싶었지만 끊임없이 김대중하고 싸웠어요. 노무현하고도 싸우고 정치 잘하라고 청와대에 성명서를 막 올려 보내고.

정 : 민주정부 시절 명예회복된 부분도 아쉽죠. 처음엔 형님이 20% 민주화운동 인정을 받고 2008년에 60% 인정을 받았지만, 끝까지 싸워서 100% 인정을 받고 진실이 뭔지 드러내고, 결국 자살로 판명이 되더라도 끝까지 싸워서 정확한 판명이 됐어야 했는데 아쉽죠. 중간에 아버님께서 쓰러져서 돌아가시고 이게 의문사로 남게 된 거죠.

기자 : 당시 의문사위 조사가 부실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정 : 아뇨. 정말 조사는 광범위하게 잘하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의문사로 남을 수 밖에 없었고, 이 사건의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게 아쉽다는 거죠. 시대가 지나면 사건 관련자들은 다 죽고 영원히 미스테리로 남게 되겠죠. 이미 사건이 벌어진지 34년이 지났고..

기자 : 사건 관련자들이 살아 있다면 어머님 연세(77세)정도 되겠네요.

정 : 가장 정확한 거는 박정희 시대 경찰청에서 조사했던 문건을 보면 나오겠죠. 그 문건을 확보해야 되는데 그게 쉽겠어요. 배짱있는 정부가 완전히 뒤집어놓고 다 밝혀내기 전에는 아무것도 되지가 않죠. 걱정스러운건 경찰이나 다른 기관에서 자신들이 한 일이 기록된 문서들을 파기시켰을 수도 있다는 거에요.

기자 : 최근에도 민간인 사찰 문건을 폐기시키고 감옥에 간 사람들이 있죠.

정 : 그런 일이 (과거 문서에도) 있었다면 진실을 파헤치는 데에도 한계가 있겠죠.

기자 : 긴 시간 감사합니다.

Posted by 주간경향